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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비잔티움 14, 고대부터 중세까지

by 7번째 2020. 3. 27.

7세기와 8세기에 비잔틴 행정부의 재편으로 폐지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무실 중 하나가 도시의 사무실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사제. 그는 또한 식품 공급을 감독하고 콘스탄티노폴리탄 경제의 '최고 수준'으로 생각되는 것을 규제한 혐의도 받았다. 이것은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초 도시에 발행된 지침서인 서문(Eparchikon Biblion)이라고 불리는 텍스트에서 특히 명확하게 나타난다. 식품, 상업 서비스 및 돈의 취급이나 생산을 담당하거나 또는 의례용으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책임이 있는 콘스탄티노폴리탄 감옥에 관하여 황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빵사, 식료품 업자, 생선 가게, 이슬람교 동부에서 수입된 국산 직물 또는 직물 판매업자, 비누 및 왁스 판매업자에 관한 규정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합법적인 공증인들, 은행가들, 그리고 돈 세탁 업자들 뿐만 아니라 돼지 고기 정육점들, 양 고기와 소고기 정육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오직 제국 주의 당국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역일 뿐인데, 그들은 감독과 통제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넘어서 광범위하게 규제되지 않는 상업 활동의 광범위한 중단을 상상해야 한다. 가축과 다른 생필품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시장에 도달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멀리 이동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심지어 법정의 의식적인 리듬이 시의 음식 공급의 리듬과 일치하도록 교정되었다. 황제와 그의 수행원들이 도시를 이종 교배하는 행렬들 가운데서, 기념비의 기록으로 알려진 황실 의식의 10세기 모음집, 따를 프로토콜들 스트라테긴의 곡식 저장고에 공식 방문을 했을 때 였다.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에 관한 한, 어떤 것도 운에 맡길 수 없었고, 또한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기념비서는 기록한다. 눈은 황제가 검사하고 진실을 말하는 어떤 곳이든지 측정할 수 있다. 황제가 완전히 안심했을 때만이 그 행렬은 계속될 수 있었다. 

4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각각 독립된 통치자가 있었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두 지역 사이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으며, 서쪽 제국과 이탈리아, 갈, 영국, 이베리아 반도, 아프리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5세기 초에 제국 전체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넘어 흉노와 여러 게르만족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력을 받았다. 이 압력은 특히 제국의 서부 지방들과 관련하여 두드러졌다. 그곳은 야만인 침략의 피해를 많이 받았고 점차적으로 중앙 제국 통제권, 예를 들면 470년대 초반, 서부 제국은 이탈리아를 겨우 넘어 뻗어 있었다. 476년 마지막 서부 로마 황제 로물 루스 아우구스톨루스(' 작은 아우구스투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이를 알리는 고딕 장군 오도아세르에 의해 물러났다. 이제 서구에서는 황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5세기 말에 이탈리아, 스페인, 갈, 아프리카의 고딕, 프랑키르, 부르나키스 아래에 통합된 지중해와 로마의 패권 국가가 나타났다. 반달족의 감독을 맡았죠 로마의 지배는 로마에서도 상실되었다. 이러한 정권들 중 일부의 지도자들은 남아 있는 Rom의 자리에서 나오는 대단히 중요한 제국의 지배력의 개념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콘스탄티노 폴리스의 황제, 반달족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황제의 보편적 권위에 도전했고, 동시에 채택한 반면에 황제의 권리 주장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점점 더 제국 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예를 들어 스페인과 남부 굴에서는 고딕 제도(로마 조직자의 도움)가 재산과 다른 민감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로마 법을 개정하고 개정하기 시작해서 제국의 특권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Goths와 Vandals는 또한 엄격하게 허가된 기독교 신앙의 정의가 된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