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들은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은으로 만든 접시들을 벗었고 도시의 재산은 고갈되었다. 이 기금들은 서쪽의 아바타들과 평화를 위해 그리고 트랜스코카서스의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예루살렘 함락과 관련된 공포심을 강조하고 분명한 특징이었던 종말론적 감수성을 이용한 종교 선전 운동에 의해 강화되었다. 당대의 이와 동시에, 황제는 유격전 전술에 정통하고 종교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집중적으로 훈련된 보병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이교도에 대항한 기독교 '성전'의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광활한 지역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군대를 교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북쪽으로 향하여 코카서스 산맥의 고원으로 향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그는 기독교의 수도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고 이동성이 높은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보다 앞서 있을 수도 있다. 624년에 헤라클레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격한 로마인들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그들이 가는 곳의 여러 도시에 쓰레기를 버리고, 무아들의 동물원 종교의 총리를 파괴하였다. 타크이 슐레이만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복수이다. 그 후 곧 헤라클레스는 그 지역의 기독교 귀족들에게 그의 소환장을 발부했고, 또한 터키 대사관을 카프카서스 북쪽으로 보내, 동맹을 맺기 위한 시도로 무서운 디딤돌을 놓았다. 페르시아인들이 코카서스 산맥의 산과 계곡들에 헤라클리우스를 꼼짝 못하게 하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속된 시도는 실패했다. 이에 따라, 626년 페르시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평균과 함께 공동 공격을 함으로써 그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Avar의 포위 공격은 실패했다. 게다가 헤라클레스는 그 미끼를 잡지 못했고, 그의 백인 동맹을 계속 키워 왔다. 황제가 터키와의 동맹을 활성화시킨 것은 바로 지금이었다. 627년, 로마와 터키 연합군이 코카서스와 카스피 사이에 페르시아의 북부 방위 지역을 급습해 페르시아 중심부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 남쪽으로 밀어 넣었다. 터키인들은 북쪽으로 돌아왔지만, 헤라클리우스는 크레시폰의 페르시아 수도를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눌렀다. 쿠스로 2세의 군대가 아시아 마이너에서 채택한 불탄 대지 전술의 변형이었다. 크레시폰 공황 상태에 빠진 군과 법원 관계자들은 3월 24일 헤라클리우스에 도착해 Khusro2세가 쿠데타로 물러나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뒤이어 일어난 협상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진정한 십자가와 가까운 동양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부활시켰다.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승리의 파견이 발표한 대로 추락한 것은 신의 적인 오만한 Khusro이다. 그는 땅 속 깊은 곳으로 떨어져서,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동 제국은 복구되었고, 적어도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 예를 들어 동양에 대한 제국 주의적인 집중은 발칸 반도에서 그것의 위치를 더욱 극적으로 약화시켰다. 626년의 패배로 아바르 연합이 폐허가 되었지만, 고원 지대 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의 저지대가 자치 슬라브 트리브에 의해 점차 정착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와 아시아 마이너는 전쟁의 재정적인 노력에 지쳐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서는 이 시점에서 제국 주의적 통제를 철회한 것이 대체로 명목적이었음에 틀림 없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정부의 전통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복원이 일어나기 전에, 제국은 그것의 확장되고 대체로 방어되지 않은 아라비아 국경으로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6세기와 7세기 초의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경쟁은 남쪽으로 아랍 부족들과 일련의 군사적, 외교적 거래에 두 제국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같은 강대국들의 개입은 일부 역사학자들이 아랍 사회의 요소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반란'이라고 규정한 것을 촉발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부터 아라비아로 유입된 특정 종교와 사상을 전파하고, 자율적인 종교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외부의 간섭에 맞서 단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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